[북데일리]
<벽장 속의 아이>(아름드리미디어. 2007)라니...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소설의 제목이 특이해 아무 생각없이 책을 펼쳐 들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느닷없이 다섯 살배기 아이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해야만 했기 때문.
불과 한 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말이다.
<벽장 속의 아이>는 프랑스를 경악시켰던 ‘실화’를 재구성한 소설이다.
줄거리는 너무도 간단하다.
다섯 살 장은 요에 오줌을 쌌다.
새아빠는 그런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냈고 그 벌로 아이를 벽장에 가둬 버렸다.
아이는 잘못을 빌며 꺼내 줄 것을 사정을 해보지만 새아빠는 더욱 화를 냈다.
엄마는 장을 끔찍이 싫어하는 새아빠의 눈치를 보느라 아이를 달래며 조금만 참으라고 한다.
그렇게 아이는 9개월을 벽장 속에 갇힌 채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안간힘을 쓰면서,
주먹으로 발로 온몸으로 장은 닫힌 벽장문을 향해 돌진한다.
그러다 아이는 문에 돋은 나무가시들에 생채기가 나고, 삐쭉 튀어나온 못들에 여린 살을 찢긴다.
공포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아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중략)
… 아이는 절망과 슬픔과 엄마의 위선을 향해 울부짖는다.
나갈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렇게 해주기로 약속했잖아.
약속했잖아...”
책은 가볍고 얇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참기 힘들만큼 무겁고 아프다.
힘없는 어린 아이가 겪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분노로 치가 떨렸다.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장이 벽장에서 나오는 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도저히 책을 놓을 수 없다.
저자는 그렇게 독자들을 장의 숨 막히는 벽장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어떻게, 고작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를 그토록 끔찍한 공포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을까.
사람이라면, 적어도 ‘양심’이란 것이 있을 텐데...
제 아무리 전 남편의 혈육이라 해도,
그래서 그 아이의 존재가 못 견디게 싫다 해도,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아이가 벽장 안에 갇혔다는 사실도 끔찍한데 더욱 참기 힘든 것은,
자신을 벽장에 가둔 채 방관만하는 엄마에 대한 아이의 한없는 사랑과 믿음이다.
아이는 벽장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엄마의 움직임을 쫓는다.
마치 따뜻한 엄마의 자궁으로 다시 들어왔다고 애써 생각하면서 말이다.
장은 자신 때문에 새아빠가 엄마를 때릴까봐 어둠 속의 두려움과 공포를 참고 견딘다.
그러나 엄마는 자꾸만 벽장 속의 장을 잊어버린다.
또한 여동생 노엘이 태어난 뒤로는 이제 장이 벽장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네 벽장"이라는 말과 함께 아이를 방치하고 만다.
엄마의 사랑에 목이 타들어가는 어린 아들의 믿음을 엄마는 너무도 간단하게 져버리고 만 것이다.
아이는 외 증조할머니와 이웃의 도움으로 9개월 만에 벽장 속을 나올 수 있게 된다.
엄마의 사랑을 잃어버려 절망과 공포에 찌든 그제야 그토록 갈구했던 벽장문이 열렸다.
“다 해진 원피스를 거머쥔 채
벽장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저것이... 아이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구역질이 절로 나는 저 더러운 것이?
얼굴을 다 가린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깨지고 물어뜯어 짐승의 발톱같은 손톱을 한 저것이?
바로 곁에 놓은 똥오줌으로 넘쳐나는 양동이와,
다 터져버린 더러운 요와 개도 덮지 않을 것 같은 악취나는 이불에다,
팔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을 껴안은...
아무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다.
정말 소름끼치는 건 공포영화의 비명소리가 아니다.
그건 우리가 말문이 막혀버렸을 때,
할 말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바로 그것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참함과 고통스러움으로 일관한다.
분노가 끓어올라 책을 집어던지고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심장과 목을 조여 왔다.
힘 없는 어린 아이에게 가해지는 어른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르고 아픈 눈물이 가슴을 때렸다.
선혈이 낭자해 끔찍하고 잔혹한 살인을 소재로한 소설들보다도 수백 수천배 끔찍하다.
책을 읽으면서
‘차라리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이란 생각이 수도 없이 들 정도다.
허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줬던 이기적인 어른들은 이 소설이 주는 고통을 한번쯤 느껴봐도 괜찮다.
단, 자라나는 아이들에게까지 어린 장의 아픔을 나누게 할 순 없으니
당연히 '19금'이다.
19금 중에서도 가장 수위가 높은 ‘트리플 크라운’ 감이 아닐 수 없다.
(사진=아동학대 공익광고 포스터)[구윤정 기자 kido99@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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