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려니 했는데 폭설이 쏟아졌습니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밤거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태워야 했습니다. 엄청난 눈 무게에 눌려 비닐 하우스가 내려앉고, 어떤 이는 기름 떨어진 자동차 안에서 눈에 갇혀 배 쫄쫄 곯으며 하루를 보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어디에 꽁꽁 숨었다가 불쑥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일으켜 사람을 당황시키는 것이 삶인지……. 그래도 이제 곧 화사한 옷차림의 봄이 우리 곁에 다가오겠지요. 고운 봄이 스러진 사람들의 시름도 다시 일으켜 주겠지요.
믿는 구석이 많으면 마음이 좀 편하려나. 봄에 기대고 또 그림책에도 기대 봅니다. 마쓰이 다다시는 그림책이 어린이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그냥 ‘즐거운 것’이라 했습니다. 즐겁다는 그림책 세계. 그 곳 이야기를 하며 마음을 환하게 풀고 싶습니다. 문이 열린 지 그리 오래지는 않지만 지금 한창 잰 걸음으로 걸어 가고 있는 우리 그림책 세계. 그 가운데 서 있는 한유민 그림 작가를 찾아 갔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 지구에 있는 작가의 집은 봄 느낌처럼 아기자기하고 아늑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주인이라서인지 모딜리아니의 큰 스케치 한 점이 벽에 편안히 누워 있었습니다. 독특한 인형이 놓인 구석 자리며 색색의 천을 가지런히 포개 접어 둔 장식장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깔끔하고 세련되게 가꾼 집안 분위기에 젊음이 물씬 풍겼습니다.
“그림책 주인공들이나 동물을 인형으로 만들어 보려고 인형 만들기를 배우고 있어요. 동네에 있는 문화 센터에 가서 퀼트 선생님께 배워요. 인형 만들고 퀼트하고 아이 옷도 만들고요. 까만색 인형은 얼마 전에 남편이 ‘상상속 TV전’이라는 전시회를 열었을 때 제가 만들어 주었던 걸 집에 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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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과 작업실 벽에 붙여 둔 딸 지민이 사진, 거실 모습 |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파고들어 알아 보게 되고 관련된 다른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곤 합니다. 조각 하나를 살짝 밀면 연달아 쓰러지며 멋진 무늬를 만드는 도미노 게임처럼, 좋아하는 일은 즐거운 마음의 움직임인 것이 분명한가 봅니다. 그림책 세계에 발을 디딘 지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 그런데 이제 그림책 세계로 재출발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래서 그림책 주인공들을 인형으로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인형 만들기 공부도 하고 퀼트도 배우고 계시답니다. 예쁘게 만들고 꾸미는 걸 좋아했으니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자연스러웠을 테고.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가 그림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 선배의 영향을 받으셔서랍니다.
“그림책은 생소했지요. 그런데 그 때 대학 선배였던 한병호 선생님을 통해서 이런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선배님이 작업하시는 걸 보니 그림책이 해 볼 만하고 재미있는 것 같아서, 제 작업을 하게 된 겁니다.”
좋은 곳에는 따라 가고 싶은 게 당연한 순리겠지요. 그림책 세계를 곁에서 지켜보다가 그 세계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는 한유민 그림 작가는 『고구려 나들이』와 『나의 춘향전 이야기』에 그림을 그리게 되셨답니다.
“출판사에서 기획한 그림책이었어요. 고구려와 고구려 벽화에 대한 자료 수집을 열심히 다녔어요. 박물관에도 자주 갔지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구려에 대한 책을 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도록 전호태 선생님께서 도와 주셨어요. 그래서 자료를 사진으로 찍고 그걸 참고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었어요. 그 때 신화에 대한 공부도 하고 그랬지요. 잘 모르고 있던 고구려 벽화에 대해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얼마 전, 고구려 역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중국이 주장하면서 고구려 연구에 한창이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조금 다르지만 수년 전에도 고구려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그 때 나온 고구려에 관한 그림책으로, 벽화에 나오는 인물 하나하나를 친근하게 되살려 낸 솜씨가 돋보이는 『고구려 나들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벽화에 등장하는 역사가 씽긋 윙크를 하게 그린 일, 테두리를 독특하게 처리한 의도, 그림을 그리는 과정 등에 대해 이야기를 청하였습니다.
“벽화의 인물들이 살아서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내용이니까요. 빛이 들어가면 어둠 속에 있던 인물이 눈이 부셔 눈을 찡긋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표현했지요. 그림 테두리는 디자이너가 여백을 준 것이에요. 저는 멋 내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디자인하는 분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글과 그림을 혼자 다 맡아서 하면 모르는데 기획되어서 나오는 것은 편집자나 디자이너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지요. 그림은 한지 작업입니다. 동양화과를 나와서 그런지 한지가 손에 익어서 편안해요. 스케치하고 나서 한지에 초벌칠을 한 후 그렸어요. 채색화 쪽 기법이라서, 아교칠을 해서 한지에 막을 입히면 물감이 덜 스며들고 채색할 때 번지는 것이 덜해서 그렇게 작업했어요. 진채로 그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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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북치는 게 좋아! 난 노래하는 게 좋아!』『구렁덩덩 새 선비』표지, 준비 중인 그림책 더미북 | 민기와 희기라는 아이가 고구려의 옛 무덤에 들어가서 벽화의 주인공들을 만나는 이야기로, 아이들이 고구려 문화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도와 주었던 그림책이었습니다. 이 그림책 작업을 마친 다음 작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담은 창작 그림책을 만들었습니다. 황금도깨비 상을 받았던 『난 북치는 게 좋아! 난 노래하는 게 좋아!』입니다.
“나무 조각을 가지고 공모에 냈어요. 그런데 상을 받고 나서 책을 낼 때는 전체적인 줄거리나 그림이 달라졌지요. 편집자하고 이런 식이 어떨까 의논하고 이야기 나눠서 만든 것입니다. 한지에 오일 파스텔로 그렸어요. 한지는 꺼실거리지만 푸근하고 가라앉은 느낌이 나와요. 저는 눈에 확 뜨이는 색감보다 스며드는 느낌을 좋아해서 한지에 서양화 색감을 사용해서 그렸어요. 종이에 했으면 강한 색이 나왔을 거예요.”
어두운 듯하면서도 밝은 색감으로 아이의 마음을 잘 옮겨 놓았던 그림책입니다. 앞장과 뒷장에서 서로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가 책 가운데서 하나가 되는 구성이 독특합니다. 그 그림책을 완성한 뒤 우리 옛이야기 그림책인 『구렁덩덩 새 선비』를 만들었습니다. 민화의 색채를 그림책에 자연스럽게 녹여 낸 점, 시차(時差)가 나는 행동을 한 화면에 배치한 점, 이야기의 처음과 나중을 상징하는 소품을 면지에 이용한 구성이 재미있습니다.
“옛이야기 그림책이니까 옛이야기 느낌이 나고 시대에도 맞아야 하니까 민화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민화의 소품을 따와서 그렸어요. 근데 새 신랑이 사람이 되는 순간은 다시 그려야 했어요. 칠이 끝난 다음이었는데 그림에 신비한 느낌이 안 나는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지요. 새 신랑이 세 개의 독으로 들어가는 부분을 민화의 구름, 꽃 모양을 넣어 다시 표현했어요. 그리고 각시가 새 신랑을 찾아가는 장면들은 산등성이 능선을 라인으로 넣어서 길을 가고 있는 느낌이 나도록 했어요. 한 장면만 보여 주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지요. 면지에도 아들을 상징하는 고추를 소품으로 그리고 뒤에는 꽃을 그렸어요.”
우리 문화, 아이의 마음, 옛이야기, 학습 등 다양한 분야의 그림책 들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요? 다음엔 가족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계획하고 계시답니다. 어떤 어려운 일들도 포근하게 마음 맞춰 긍정적으로 풀어 나가는 것을 좋아해서, 가족끼리 따스함을 나누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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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자전거에 우리 동네를 태우고』『가만히 들여다보면』『농사리 사람들』 표지 | “저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가 좋아요. 상상도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상상이 좋고 인물이 드러나는 그림책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인물이 크게 드러나는 것은 이번 그림책이 처음이지 싶네요. 처음엔 가족이 중심인지, 아이가 중심인지 정하기 어려웠어요. 군더더기를 버리는 것도 힘든 과정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아이를 부각시키는 데로 마음을 모았는데 사람을 그리는 문제가 크게 다가왔어요. 특히 아이의 체형 표현이 어렵더라구요. 아이들은 라인이 달라요. 그래서 아이들 관찰을 많이 했어요. 어린 애들 있으면 자료로 사진을 찍어 놓고 그림을 그렸지요. 보니까 아이들은 어깨 선까지 둥글더라구요.
제 성향이 그래서 그런지 다른 나라 그림 작가 중에 하야시 아키코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요. 그는 대부분 인물 위주 이야기를 만들지요. 아이의 모습을 그리는 표현력, 특히 아이들 동선 표현이 기막히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닮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해요. 그 사람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이가 느껴져요. 아주 사실적이지 않으면서도 아이와 아이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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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의 내 이빨』『15분짜리 형』『차차 혼자서』 표지 | 따스한 이야기로 아이들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은 심정이 작가의 얼굴에 그득했습니다. 그 따스한 마음이 곧 우리 아이들을 푸근하게 감싸 안겠지요. 이제 그림책 이야기를 마치고 여러 동시집과 어린이 책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습니다.
“동시집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시에는 함축적인 표현도 많고 작가의 성향도 강하게 들어 있으므로, 세밀하게 해석한 후 그림에 들어가야 해 참 어려웠어요. 동화책도 마찬가지였는데, 만화를 좋아해 만화 효과도 많이 쓰곤 했지요. 개인적으로는 동화책에서는 그림보다 글에 눈이 더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그림은 간단하게 처리하지요. 글이 중심이 되면서 두고두고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요.”
너무 책에 대한 이야기만 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무렵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림책 『무늬가 살아나요』를 그렸던 남편 안윤모 화가와의 이야기입니다. 같이 그림 그리는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들에 관해서였습니다.
“작업하러 가기 귀찮을 때는 남편은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곤 해요. 신혼 시절엔 작업실과 살림집을 같이 썼거든요. 사무실 반을 막아 패널을 깔고 침실로 쓰고, 우리가 만든 샤워 부스에는 순간 온수기를 달고 벽도 우리가 페인트 칠했지요. 그 때는 일어나면 바로 작업할 수 있었고 또 작업하다가 쓱 들어가서 쉴 수도 있어서 일에 몰입할 수 있었다고요. …… 서로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합니다. 내 작품 어때, 하고 물으면 서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단점을 먼저 보게 되지요. 그래서 서로 안 들으려고 해요. 실컷 물어 놓고서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고치고, 서로 기분 나빠합니다.”
같은 길을 걷는 일은 동무가 되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가 봅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그림 그릴 때 옆에서 같이 그림을 그린다는 딸 지민이도 커서 그림책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한답니다. 이제 한 길의 세 동무가 될 터인데 좋은 일이 더 많겠지요. 그런 행복한 이야기들 끝으로 작가의 바람에 관한 이야기로 만남을 접었습니다.
“지금 그림책을 준비하는 저는 학생 같은 자세예요. 10년을 하고 나니까 인제 좀 그림책에 대해서 알고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다는 것을 알겠어요. 찬찬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많아요. 이런 색감을 쓰면 아이의 이런 마음과 느낌이 나오겠다 하는 게 느껴져요. 이제 시작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돌아보면, 열정을 담고 글 작가나 편집자와 계속 만나 이야기하면서 만든 작품에 더 애착이 가는 것 같아요. 외국에는 그림 작가와 글 작가가 짝을 이루어 그림책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저도 좋은 글 작가 한 분 만나서 꾸준히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출판사도 서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곳이면 좋겠구요.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하지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좋은 그림책 세계를 일구어 가면 우리 그림책 세상이 더 풍요롭게 되겠지요. 그럼 그 그림책을 보며 자라는 아이들의 마음도 더 즐거워지겠지요. 즐거움이 즐거움을 낳는 행복한 미래. 그 따스한 꿈의 씨앗을 마음에 품어 봅니다. 그리고 다가올 봄을 기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