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풀

65년차 DJ “내 목소리 한번 들어보시겠소”

강개토 2010. 9. 4. 10:20

 

[한겨레]
 
고전음악 감상실 '녹향' 이창수씨
"사랑에 보답" 아흔 나이에 마이크

 

 

 

올해로 65년째 쉼없이 고전음악을 틀고 있는 국내 최초의 고전음악감상실 '녹향'.
대구 중구 화전동에 있는 녹향의 디제이박스에 검은 턱시도 한 벌이 반듯하게 걸려 있다.
다림질이 잘 된 이 옷은 오는 4일 오후 7시30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대구음악제의 무대의상이다.
 
옷을 입을 주인공은 녹향 주인 이창수(90·사진)씨다.
 
이씨의 말대로 그는 "녹향과 함께 늙었다".
스물다섯 청년 때 처음 녹향을 열었다.
고전음악을 틀고 감상하는 일을 평생의 밥벌이와 취미로 삼고 살아왔지만,
자신이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손님이 놓고 간 주부대학 노래책에 '대구시민의 노래'가 있더라고.
이날까지 녹향을 아껴준 시민들에게 내가 이 노래를 한번 멋지게 들려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지."

이씨는 혼자서 노래 연습을 거듭했다.
박영호 대구시립합창단예술 감독이 그의 생각을 전해듣고, 대구음악제 무대 공연을 제안했다.
300여명의 연합합창단과 대구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그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
이씨는 "음악을 많이 듣다보니 부르는 것도 자신 있다"며 "다들 많이들 구경오시라"며 웃었다.

이씨가 나이 아흔에 시민들에게 노래를 선물하고 싶은 데는 숨은 이유가 있다.
녹향은 지난해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닫을 처지에 놓인 바 있다.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주머니를 털어 임차료를 모아주고,
음악을 아끼는 이들이 녹향에서 공연을 펼치며 재능을 기부했다.
덕분에 오늘도 녹향에서는 고전음악이 흘러나온다.

녹향은 화가 이중섭, 시인 유치환 등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대구의 명소였다.
음악감상실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줄이 늘어서 있기 일쑤였다.
1980년대부터 내리막을 걷기 시작해 최근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날도 잦다.
그래도 이씨는 날마다 정오에 문을 열고 오후 여섯시에 닫는다.

매달 셋째주 토요일에 열리는 '예육회' 정기음악회는 지난달 1516회째를 기록했다.
 
학창시절 추억을 곱씹는 이들, 고전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찾아온다.
이날만큼은 20~30명씩 객석을 채운다.
그는 "더없이 반갑고 고맙다"며 뿌듯해 했다.
녹향의 디제이박스에는 그와 함께 늙어버린
엘피(LP) 레코드판과
최신 공연 실황 디브이디(DVD)가 나란히 꽂혀 있다.
 
지난 세월의 추억을 간직한 채 새 마음으로 무대를 준비하는 그의 설렘도 그 안에 있다.
대구/글·사진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